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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닥터컬럼

제목

내가 만난 천사들

작성자
마인드닥터
작성일
2009.04.2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458
내용
내가 만난 천사들 - 한 치호

1. 온화한 천사

부인은 자신을 지옥에서 건져주셨다면서 추석에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들고 오셨다. 항상 온화한 표정으로 곱게 인사하시며 들어오시는데, 뒤따라서 까만 얼굴의 불안한 눈빛의 남자가 들어온다. 내가 이분의 부군을 치료해온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현장에서 추락하여 뇌를 다친 후 지적수준의 저하와 더불어 가장 힘들었던 이유는 인격의 변화로 인한 행동문제 때문이었다.

선하고 건강했던 사고 이전의 모습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인지기능은 의지할 수 있는 가장의 모습이 아니라 항상 긴장하며 돌보아야 했던 큰 아이였다. 충동적이고 무분별한 행동, 대화가 잘 안되고 상대의 뜻을 곡해하여 흥분하고 날뛰는 남편을 붙들고 달래어야 했다.
남자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도 싫어 우울하여 술에 의존하거나 죽겠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기질성 정신장애",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산재나 교통사고 등의 사고들이 증가하면서 이런 경우들이 늘어나고 있다. 뇌를 다치면서 정신의 모든 부분에서 장애를 초래하는데 인격의 변화가 동반되어 거칠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으로 변한다. 치료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고 후 충분한 기간이 경과하여야 장애자로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의료복지혜택이라도 받아야 가족들이 감당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이분에게 해 드린 것은 산재로 인한 장애자로서 치료비를 보조받게 해준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치료를 통하여 처음보다 정도가 덜해졌다고 고마워하지만 남편을 보는 눈빛은 여전히 아이를 보듯 불안하다. 며칠 전에는 환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산속 깊숙이 정처 없이 들어가다가 불현듯이 정신이 들어 산길을 헤매다 겨우 밤늦게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일종의 간질증세로서 제 정신이 아닌데 만약 운전을 하는 중에 이런 증세가 나타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근심어린 표정을 보일 때는 비록 온화한 미소를 보일지라도 그 속내가 안쓰럽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겠는데 어린 아들에게 거친 말들을 할 때는 너무 속상해요. 정상이 아닌 아들의 모습이 속상하여 짜증을 내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보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남편이기에 더욱 마음이 무너져요.”

아들이 뼈가 쉽게 부서지고 약해지는 근골격계 희귀질환을 앓아왔는데 방송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 감사한 분들이 많다며 눈물을 글썽이는데, 옆에서 남편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다.

항상 밝게 웃으며 인사하고 매사에 감사해 하는 이 분을 보면서 정말 신은 왜 이런 분들에게 이렇게 많은 시련을 주시는지 ……. 불행 뒤에 숨어 있는, 안배해준 희망과 행운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보통사람들과 달리 시련부터 주는 이분들에게 이후에는 곧 그 이상의 행복들이 쏟아질 것이라고 믿고 싶다.

2. 수줍은 천사

보통 환자분들은 자신의 차트 하나만 들고 오는데 비하여 이 분은 여러 개의 차트들과 함께 휠체어에 태운 장애아와 활짝 웃는 순박한 얼굴의 다운증후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나타난다. 사회복지시설에 근무하는 선생님이자 아이들을 24시간 돌보아 주는 보모인데 참으로 맑고 선한 눈빛을 가진 분이다.

정신박약아, 뇌성마비, 간질 등의 심한 선천성 질환이 있어 부모로부터 시설로 맡겨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간질발작이 나타나면 온 몸의 경련이 그치지 않는 아이, 사지의 마비성 변형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기에 먹는 것부터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 덩치는 크지만 지능이 낮아 마음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등.

이들의 엄마역할을 하는 이분들은 출, 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이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살고 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아이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내 아이들이 무시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친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볼 때마다 느끼게 된다.

이분은 아이의 진료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이의 손을 놓지 않는다. 뇌성마비이며 간질 성 경련이 심한 환아의 침과 콧물을 닦아주며 귀여운 자식을 대하는 모습이다. 아직 시집도 안간 미혼의 여성인데도 이런 모습들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마 집에서는 결혼을 독촉하는 것 같은데, 이 분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녜요. 다른 선생님들은 저보다 훨씬 더 잘하시는걸요.” 내가 대단하다고 하자 이렇게 말을 받으며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개진다.
아이들에게는 이분들이 자신을 여기에 맡긴 부모보다 더 부모 같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각 방의 아이들을 전담하여 돌보는 선생님이 혹시 바뀌면 그 방의 아이들이 아프거나상태가 나빠지게 된다. 장애 아이들의 심리적 불안정이 몸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엄마 손이 약손이라는 마음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힘든 환경과 열악한 근무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거두는 천사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진짜 천사들이라고 한다.

3. 백발의 천사

우울증으로 오신 한 분을 진료하고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벚꽃이 창밖으로 흩날리는 봄날이지만 바깥은 보기보다 차가울 것이다. 우리의 봄은 항상 그랬다. 즐기기에 너무 짧고 바람도 많아서 항상 아쉬운 봄.

2층의 내 방 바로 밑의 장애인 주차장에 하얀 소형차가 조심스럽게 주차한다. 운전자인 영감님이 내리신 후 휠체어를 꺼내 펼치고 옆자리의 할머니를 신중히 부축하여 앉히신다. 이제 곧 접수하시고 진료를 보실 터이다. 내과에 먼저 가실까, 내 방에 먼저 들어오실까 점쳐본다.

할머니를 만난 것이 벌써 수년째. 응급실로 오셔서 의식이 없고 꼼짝하지 않는데 검사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는 노인이 계시니 봐달라는 내과의 의뢰였다. 가만히 진료해보니 의식은 정상이었고 움직이시지 않으려는 것이 문제였다. 오랜 지병들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시면서 불안해지면 세상과의 소통을 잠시 끊으며 몸이 굳어버리고 귀를 닫은 게 아닐까. 이럴 경우 다 듣고 계시므로 말씀으로 안심시켜드리고 치료가 되는 주사를 놓아드린다. 물론, 특별한 약물이 아니라 증류수인데 심리적 원인일 경우 이러한 위약placebo처방은 효과가 있다. 주사를 맞고 잠시 후 몸을 움직이면서 말씀을 하시니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그런데, 이제부터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날 때 이 처방에 의존하실 터이다. 아니다 다를까 우리는 2-3일 간격으로 만나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옆에서 할머니를 지키고 계셔온 백발의 영감님은 우리 정신과 직원들의 할아버지가 되셨다. 항상 밝게 웃으시며 힘든 내색을 하시지 않는 애처가 할아버지로서 이제 유명인사가 되셨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영감님께서 60여년을 함께 해로하여 이제는 검버섯으로 덮인 얼굴과 뼈만 앙상해진 아내가 탄 휄체어를 밀고 들어오신다. 몸이 불편하시지만 힘든 증상을 토로하시고 의사의 말을 들으시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신다고 한다. 오늘은 눈빛이 생기가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오늘은 한결 좋아 보이시네요.” “아이고, 내가 빨리 죽어야 되는데…….” 할머니의 말씀은 삶에 대한 애착으로도 느껴진다. 아프고 불안하시면 병원으로 빨리 가자고 재촉하신다고 한다. 할아버님은 “할망구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것이 안쓰러워 살아있을 때까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와야지. 젊었을 때 내가 고생을 많이 시켰어. 이제 그 보답을 하는 거지. 이러다가 큰 고통 없이 조용히 떠나는 게 자신도 덜힘들텐데.” 간절하며 쓸쓸한 말씀이기도 하다.

항상 빨리 죽어야 한다고 하시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으로 한사람은 앉고 그 짝은 서서 휠체어를 밀며 시간은 지나간다. 짧은 봄일지라도 무척 기다려지던 겨울 끝자락에 할아버지께서 혼자 들어오신다. ‘축 발전’이라고 적혀있는 봉투를 가만히 내 손에 쥐어주신다. “그동안 너무 고마워서……. 개업하는 병원 잘 되었으면 좋겠네. “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게 보인 것은 내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인가……. 다시 뵙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새봄의 바람은 내가 있던 그 쪽에서부터 불어온다. 작천정의 벚나무는 하얗게 새순을 보이더니 순식간에 만개했단다. 온화한 천사는 내 개인의원으로 촌닭과 음식을 들고 따뜻한 얼굴 보여주시고 가셨다. 지난 번 헤어질 때 눈물을 보이던 그녀의 남편은 반갑고 수줍은 얼굴로 말씀은 없었는데 건강해 보였다. 수줍은 천사는 다른 시설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을 그 후임자로부터 들었다. 아마 그 모습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백발의 천사님과 그 아내는 지금도 같은 모습으로 병원에 마실을 나오시는데 건강의 이상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천금보다 더 소중하게 받았던 그 봉투는 지금도 내 서랍에 잘 보관하고 있다. 기념으로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고 의원이 이런 불경기에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이 닳은 봉투 덕분이지 않을까?

( 울산수필 2009 봄 -'37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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