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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닥터컬럼

제목

그리운 골목 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3.23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978
내용


서울에서 동네의 정겨운 골목길이 이제는 몇 개 남지 않게 되었다는 보도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많은 골목들이 개발과 철거로 아파트 길과 도로 등으로 바뀌어서 전통적인 모습의  옛날 골목길이 한남동,용산 등 8개 동네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이런 골목길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 본다. 사람 사는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고 가지각색의 대문들, 오래된 굴뚝, 쓰레기통, 작은 창문- 골목에서 기다리는 연인과 내통할 수 있다-, 보도블록이나 흙으로 된 바닥...이 떠오른다. 이 그림은 사실 내 고향의 골목길들이다.

 

부산의 내 고향동네는 지금은 아주 번창하지만 당시에는 변두리의 조용한 곳이었다. 학교 가 옆에 있어 등하교가 편했는데 무엇보다 가끔 운동장에서 동네주민들을 위해 하는 천막극장도 제일 먼저 가서 볼 수 있었다. 학교의 숲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오는 싱그러운 향기는 우리 골목과 집으로 불어왔다. 또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사이에서 부는 향기도 어느 집에서 무슨 맛있는 것을 하는지 알게 했다. 

골목들과 귀퉁이 공터에는 사연들이 있었다. 골목의 흙바닥에서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다망구 를 하던 아련한 기억들, 옆집의 옥탑창으로 올라가 친구와 동네를 정찰하던 일도 떠오른다. 그 친구 누나는 착한 나에게 가끔 시비를 걸어 싸우기도 했는데 내 얼굴에 손톱으로 아로새긴  전투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날이면 동네할머니들의 대장으로 백골부대장이라 불리던 우리 할머니는 ‘어디 기집애가 남의 귀한 장손의 옥안에 흉을 만드냐’고 친구 부모님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던 까마득한 기억도 그 골목의 영상과 함께 남아있다.

 

학교가 파하면 책가방을 마루에 휙 던지고 바로 골목으로 달려 나가서 ‘00야 놀자’며 부르면 이게 신호가 되어서 아이들이 우루루 나오곤 했다. 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굴뚝너머 의 하늘에 노을이 지며 엄마가 ‘밥 먹어라’고 소리치는 그 시간까지 골목들은 우리들의 세상이었다.

조금 더 놀려고 참다가 벌어지는 불상사는 볼일 보러 급하게 뛰어가다 미처 못 참고 바지에 실례를 하는 것이었다. 수세식화장실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 그나마 재래식 화장실도 동네에 딱 하나의 공중화장실이 있어 여기로 급한 마실을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곳을 항상 지키는 오동추할아버지에게 몇 원을 주어야 큰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급한 불을 끄고 느긋하게 동네을 구경하며 오면 재미 있었다. 낮은 담장너머로 아이들의 밥 먹으며 재잘거리는 소리, 데이트 나가는 딸에게 치마를 너무 짧게 입었다며 타박하는 아주머니의 큰 목청, 초저녁 골목길의  연보라색 조각 하늘로 울려 퍼지던 이웃형님의 하모니카 소리도 배경음악이 되었다. 모두 그리운 기억들이다.

 

이러한 연유인지 골목은 나에게 정감이 가득한 대상이 되었고 여행을 가더라도 항상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노스텔지어이다. 이탈리아를 갔을때 성당, 넓은 광장, 박물관,,미술관보다 더 가고 싶고 좋았던 곳은 골목길이었다. 고풍스러운 퇴색한 담장들, 아름다운 색채의 집들, 작고 아담한 까페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 문을 열고 그들의 사연으로 들어가고 싶은 곳들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에펠탑의 높이와 개선문의 웅장함의 감동은 잠깐이었지만 골목길순례를 했던 것은 오래 감흥과 여운을 주는 기억들이다. 그곳의 아치형의 골목길을 들어가면 오래된 전등이 인사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집이 반겨주는데 사람 좋게 웃고 친절한 아저씨,아줌마들이 있어서 추억의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11살에 고향동네를 떠난 뒤로 수년에 한 번씩 다시 가보게 되곤 했다. 동네어귀에 들어갈 때마다 무엇과 조우할지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골목입구에 오래도록 지키며 노점상을 하시던 옆집 그 친구의 엄마는 수줍은 사춘기 소년을 바로 알아보고 ‘잘 있었니 ’하며 인사를 건네곤 하셨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던 그 골목길을 그냥 돌아다녀 본다.

집들이 층을 더 올리며 골목길은 작아 보이지만 거의 변하지 않았던 모습에 내심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행여 어릴적  친구들이 ‘치호야‘ 하며 갑자기 부를 것도 같아 괜히 미리 두근거리고 쑥쓰러워진다. 세월이 지나면서도 가족이 고향의 작은집에 들를 때마다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내 어릴 적 뛰놀던 길들을 순례한다. 그럴 때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소식을 못했던 그 친구들이 그 자리에 살아 있고 같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들과 같이 오랜만에 같이 어울리며 숨 쉰다.

 

놀자 하고 부르면 개구쟁이 친구들이
공처럼 튀어나오며 환하게 웃던 그 곳
몽당치마 계집애들이 작은 발을 폴짝 뛰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바둑이와 누렁이가
한가롭게 노딜던 그 곳

“학교 댕겨오냐?“ 항상 같은 곳에서
같은 질문을 했던 구멍가게 할머니
엉킨 전선줄만큼이나 복잡했던 하루해가 지면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

(중략)

가진 것 없어도 행복했던 사람들이 네 것 내 것 없이
남루한 삶을 서로 나누던 그 곳
누추하지만 일상의 가치가 빛나고
왜소하지만 넓었던 품을 가진 그 곳
아직 거기에 있을까요?
                   ( ‘지식 e ‘에서 발췌한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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