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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닥터컬럼

제목

꽁트 한 영혼의 독백

작성자
마인드닥터
작성일
2009.04.1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290
내용
꽁트 한 영혼의 독백

아주 편안하고 나른한 느낌이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뒤의 기분이 좋은 공허감이라고 할까? 그런데, 내가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사람이 누워있다. 나무 관속인 것을 보니 시체라는 말인데, 가만히 보니 바로 나의 얼굴이 아닌가? 아니 내가 왜 저 좁은 곳에 벌써 들어가 있는 것일까? 그게 아득한 꿈이 아니었던가?

친구들과 술자리후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적당히 오른 취기에 절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앞에 가는 어린 여자아이의 앙징맞은 뒷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져 웃음이 나오며 가만히 지켜본다. 순간 갑자기 굉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모퉁이에서 뛰쳐나오며 아이를 들이받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 애를 밀쳐내는데 내 몸이 번쩍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아프다는 느낌은 없고 그냥 적막한 짧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하얀 빛으로 가득한 터널을 지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긴 잠을 잔 것 같았는데 이렇게 깨어나 공중을 부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안다. 내 삶이 이제 끝났음을. 아까의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보았던 것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었구나. 그 찰나의 시간에 나는 나의 일생을 다 보았다.

일인칭이면서 또한 전지적작가의 시점이었는데 담담한 마음으로 내 생애의 아쉽고 후회가 되는 모든 순간들을 보았다. 이루지 못한 것의 아쉬움은 없었다. 하지만 베풀고 나누지 못한 시간들, 모든 고통들은 그저 자기애적인 행동의 업보였음을 알게 되면서 내 자신이 밉기도 하고 안쓰럽다. 남아있는 당신들이 이를 미리 안다면, 그래서 미리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없을텐데...

남은 사람들은 지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어린아이를 구하고 희생했다며 무슨 영웅인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사람들아, 내가 무슨 영웅이겠는가? 평범한 소시민이고 자기 가족만 챙기기에 급급했던 불쌍한 사십대 중년이었지. 누구에게나 영웅의 심성은 있는 것이라오. 나는 그 아이가 오토바이에 치이려는 순간 어떤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다시 기억해 본다면 그 순간 그 아이가 타인이라는 느낌이 아니고 나와 이어진 또 다른 나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내가 나를 구하는 행동은 이타적인 것도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전지적 시점으로 보니 이제 알겠다. 사는 동안 타인들과 나는 별개가 아니라 연결된 하나였음을. 경쟁하고 미워했던 당신들이 나의 또 다른 모습이고 다른 구현이었을 뿐 사실은 나 자신이었음을. 이렇게 나와 연결된 神이 이제야 말해주고 있다. 온 우주와 내가 연결된 이 느낌을 살아있을 때 가졌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텐데...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소란스럽다. 문상을 오는 사람들이구나. 나 죽으면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보자. 그래, 저 친구는 당연히 와야지. 항상 선한 얼굴로 양보를 잘하던 친구였지. 남을 밞고 올라가려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너무 어질게만 살아가는 저 친구를 보면서 독하지 못하고 약하다고 동정했던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겠다. 친구, 그래 많이 슬퍼해주게. 내가 그대 마음에 그만큼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만 슬퍼하게. 헤어짐의 섭섭함이라면 모를까, 내 존재가 당신들의 앞에서 없어진 것에 대한 애도는 할 필요가 없네. 이 생애가 전부가 아니고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일 뿐이니까. 모든 인연과 사건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인과의 귀결이니 슬퍼할 것도 노여울 것도 없지.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 생애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는데 말이야.

우루루 몰려오는 직장동료을 보니 새삼스럽다. 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같이 지내온 사람들인데 내가 매너리즘으로 대했어. 현재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인데 가슴으로 소통하지 못했음이 후회스러워.

그리고 뒤의 사람들은 짐짓 무거운 얼굴로 분향을 하는데 나름대로 성공을 한 친구들이다. 매일의 수입에 일희일비하고 술자리에서 스트레스를 풀며 살아가는 군상들. 당신들은 지금 절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자신이 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지, 생명의 무상함에 허무감을 느끼는지, 벌써 내가 그리운지 궁금하군. 아니,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평가가 궁금하오. 아니,아니 궁금하지 않소. 내가 이제 알게 되었는데 무슨 평가가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마음이 왜 이리 무거울까? 그래, 나의 분신이었던 가족들, 마누라와 알토란같은 자식들이 있지. 갑자기 당한 청천벽력에 망연자실, 아득한 슬픔에 빠져있구나. 여보, 당신은 자신이 평소 허약해서 이 다음에 나보다 먼저 갈 것 같다고 하였지. 그러면서 나더러 너무 빨리 재혼하지는 말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아주 착한 여자를 택하라며 농담을 하고 했지.

결국, 내가 먼저 가게 되었는데 나는 당신이 다른 남자와 사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었어. 그러니 힘들겠지만 그냥 내 생각하면서 혼자 살아가면 좋겠어.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이전에도 했었지. 서로를 미워하고 으르릉 거리며 이혼이야기도 나왔을 때가 있었지. 이혼을 하고 나 없이 살아가며 내가 그리워서 이혼을 감행한 자신이 너무 미워서 가슴을 쥐어뜯는 모습을 상상했었지. 어쨌든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었어.
아,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겠어. 대단한 것을 주지는 못줄지라도 사랑한다는 말은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음을 이제 아니까.

자, 이제 더 머물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연결된 이 은줄을 따라 올라가야지, 내가 떠나온 곳으로. 아, 기억이 난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선험적 기억들. 전생들의 기억과 내가 이 삶에서 깨우쳐야했던 의미들. 이제 저 빛 속으로 정말 올라간다. 음악소리와 함께 은줄이 연결된 옆구리가 아프다. 점점 더 눈부시어 지면서 다소 불쾌한 느낌이 드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휴대론 알람소리가 안 들려요?! 빨리 일어나요, 또 지각하겠네.”
눈부신 형광등 빛에 눈을 뜨면서 옆구리에 깔려있는 휴대폰을 끈다. 아! 꿈이었나? 그게 다 꿈이었단 말인가?
“오늘도 술 약속이 있다고 했죠? 벌써 지금 며칠 째예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당신이 그렇게 해주지를 않잖아요? 오늘은 날씨가 더 쌀쌀해서 옷들을 더 챙겨놓았으니 더 껴입고 가세요.”

아-, 내가 더 사는 것이다. 마누라, 나는 이제 달라질 것이오. 후회하지 않을 삶이란 별것도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들을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분신들인 사람들에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아, 그래 가장 고마운 사람은 당신이지. 내 마음 알지? 사랑하오, 사랑해... 아, 또 표현이 안 되는군...
“당신, 뭐 먹고싶은 것 없어? 들어올 때 사올께.”
“아니, 당신, 음주운전하려는 것 아니예요? 먹고 싶은 것 없으니까 12시안에나 들어와요!”
아, 이게 아닌데... “다려오리다.”

< 울산 의사회지 >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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